나주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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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주 김씨는 경순왕의 후예인 김운발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김운발은 고려 시대에 사정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이 나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조선 시대에는 김정준, 김경석, 김진, 김충수 등 여러 인물이 활약했으며, 분파로는 인충공파, 금성 김씨, 안로 김씨, 교하 김씨, 상음 김씨, 해주 김씨 등이 있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 시대 김극순, 김대경, 조선 시대 김정준, 김경석, 김충수 등이 있으며, 현대에는 김용무, 김의형, 김계원, 김창석 등이 있다. 집성촌은 전라남도 무안군, 충청북도 옥천군, 충청남도 공주시 등에 위치해 있으며, 2015년에는 약 5만 명의 인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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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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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김씨 정보 | |
기본 정보 | |
성씨 | 나주 김씨 |
한자 표기 | 羅州金氏 |
관향 | 전라남도 나주시 |
시조 | 김운발 |
중시조 | 김정준, 김인충 |
집성촌 | 전라남도 무안군 충청남도 공주시, 청양군 충청북도 옥천군 평안남도 성천군 평안북도 태천군, 영변군, 박천군 경기도 화성시 |
인구 (2015년) | 51,060명 |
국가 | 한국 |
인물 |
2. 역사
나주 김씨는 시조 '''김운발'''(金雲發)이 고려 시대에 사정을 지낸 것에서 시작된다.[1] 김운발은 경순왕의 후예로, 그의 음덕을 입어 관직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후손 김극순(金克淳)이 대장군 안로현주(安老縣主)에 봉해지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6세 '''김대경'''(金臺卿)은 호가 월당(月塘)으로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고, 그의 아들 김가구(金可久)는 예의판서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김정준'''(金廷雋)이 태종 때 동북면 난을 평정하여 중군총제(中軍摠制)를 역임하고 가문을 중흥시켰다. 김경석(金景錫)은 을묘왜변 때 왜구를 토벌하여 돈녕부사에 이르렀고, 그의 증손 김진(金鎭)은 병자호란 때 임금을 호종한 공로가 있다. 김적(金適)은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아들 김충수(金忠秀)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무안 우산사에 제향되었다.
2. 1. 시조 및 기원
나주 김씨 대동보인 1786년 병인보 및 1832년 임진보 서문에 의하면 시조 '''김운발'''(金雲發)은 경순왕의 후예로 그의 음덕(蔭德)을 입어 고려조에 사정(司正)을 지냈다고 한다.시조 '''김운발'''은 경순왕 재임 시절의 막내왕자인 계자(季子)로, 부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천년사직을 양위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산인(山人, 중)이 되었다. 그는 큰 아들 '''운발'''과 작은 아들 우발을 두었는데, 큰아들인 '''운발'''이 나주군(羅州君)에 봉해짐에 따라 그의 후손들이 나주를 관향으로 하였다.[1]
조선조 말에 들어와 경순왕의 4자라는 대안군 김은열의 〈묘비명〉이 발견되면서부터 2자 '''김굉'''(金鍠) 또는 '''김황'''(金湟)이 계자(季子. 막내왕자)로, 일부에서는 별자 덕지와 동일인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막내왕자를 막내아들로 해석한 잘못에서 온 심각한 오류이다. 그러나 역사서에는 경순왕의 계자(季子) 이름은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2]
2. 2. 고려 시대
시조 '''김운발'''(金雲發)은 경순왕 재임 시절 막내왕자인 계자로, 경순왕이 고려에 천년사직을 양위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해인사로 들어가 산인(山人, 중)이 되었다. 그는 큰아들 '''운발'''(雲發)과 작은아들 우발을 두었는데, 큰아들 '''운발'''이 나주군(羅州君)에 봉해짐에 따라 그의 후손들이 나주를 관향으로 하였다.[1]1786년 병인보 및 1832년 임진보 나주김씨 대동보 서문에 의하면, 시조 '''김운발'''은 경순왕의 후예로 그의 음덕(蔭德)을 입어 고려조에 사정(司正)을 지냈다고 한다.
조선조 말, 대안군 김은열의 묘비명이 발견되면서부터 2자 '''김굉'''(金鍠) 또는 '''김황'''(金湟)이 계자(막내왕자)로, 일부에서는 별자 덕지와 동일인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막내왕자를 막내아들로 해석한 잘못에서 온 심각한 오류이다. 그러나 역사서에는 경순왕의 계자 이름은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2]
후손 김극순(金克淳)이 대장군 안로현주(安老縣主)에 봉해지면서 고관대작이 나오게 되었다. 6세 '''김대경'''(金臺卿)은 호가 월당(月塘)으로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고, 행적이 동문선(東文選)에 드러나 있으며, 아들 김가구(金可久)는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2. 3. 조선 시대
나주 김씨 대동보인 1786년 병인보 및 1832년 임진보 서문에 의하면 시조 '''김운발'''(金雲發)은 경순왕의 후예로 그의 음덕(蔭德)을 입어 고려조에 사정(司正)을 지냈다고 한다.[1]시조 '''김운발'''(金雲發)은 경순왕 재임 시절의 막내왕자인 계자(季子)로, 부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천년사직을 양위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해인사로 들어가 산인(山人, 중)이 되었는데, 그의 큰 아들이 '''운발'''(雲發)과 작은 아들 우발을 두었으며 큰아들인 '''운발'''(雲發)이 나주군(羅州君)에 봉해짐에 따라 그의 후손들이 나주를 관향으로 하였다.[1]
조선조 말에 들어와 경순왕의 4자라는 김은열의 〈묘비명〉이 발견되면서부터 2자 '''김굉'''(金鍠) 또는 '''김황'''(金湟)이 계자(季子. 막내왕자)로 일부에서는 별자 덕지와 동일인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막내왕자를 막내아들로 해석한 잘못에서 온 심각한 오류이다. 그러나 역사서에는 경순왕의 계자(季子) 이름은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2]
후손 김극순(金克淳)이 대장군 안로현주(安老縣主)에 봉해지면서 고관대작이 나오게 되었다. 6세 '''김대경'''(金臺卿)은 호가 월당(月塘)으로 보문각 대제학에 오르고, 행적이 동문선에 드러나 있으며, 아들 김가구(金可久)는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조선시대 들어 '''김정준'''(金廷雋)은 태종 때 동북면 난을 평정한 공을 세우고, 중군총제(中軍摠制)를 역임하였으며 가문을 중흥시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있다.
김경석(金景錫)은 을묘왜변에 왜구를 토벌 평정하여 관직이 돈녕부사(敦寧府事)에 이르렀으며, 증손 김진(金鎭)은 호가 매헌(梅軒)인데 호남수사(湖南水使)로서 병자호란을 만나 막내 동생 한송공(寒松公) 김익(金釴)과 함께 임금을 호종(扈從)하였으므로 공적이 녹권(錄券)에 기록되었다. 김적(金適)은 호가 취암(鷲巖)으로 서원(書院)에 배향되어 있으며, 아들 김충수(金忠秀)는 벼슬이 호참(戶參)이며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녹권 일등에 오르고 무안 우산사에 제향되었다.
3. 본관
나주는 전라남도 중서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시대에는 발라군이었다가, 신라 경덕왕이 금산군으로 고쳤다. 후백제시대에는 견훤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고, 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점령하여 나주라 개칭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일시 이곳에서 피난한 인연이 있어 목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세조 때에 나주 목사는 진을 두고 영암·영광의 2군과, 함평·고창·광산·장성·진원·무장·남평·무안의 8현을 관할하였다. 조선후기 면리제가 정비되면서 나주목은 38개 면과 현 신안군 일대 30여개 이상의 도서를 관할하는 목사고을로 많은 호구와 전결을 보유하고 교통으로 청암도와 조운으로 영산창을 가진 큰 고을이었다.
1895년(조선 고종 32)에 지방제도 개혁으로 전국을 23부로 구분하면서 나주부가 되어 관찰사가 주재했다. 이듬해에 다시 전국 행정구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나주부가 폐지되고 나주목이 나주군이 되어 전남의 1등군이 되고, 전남의 행정중심이 광주로 옮겨졌다.
4. 분파
- 인충공파: 후손 '''김인충'''(金仁忠)은 고려조에 강화진 좌령 낭장(左領 郎將)을 역임하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1403년경 제주시 애월읍에 정착하였다. 후손들이 그를 '''제주 입도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금성 김씨: 시조 '''김대경'''(金臺卿)은 호가 월당(月塘)으로 고려 말에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하였는데, 안로현(安老縣. 금성의 고호)에 기거한 적이 있어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금성으로 하였다.
- 안로 김씨: 시조 '''김지경'''(金之敬)은 경순왕의 후예로 상계가 실전되어 계대를 상고할 수 없으나, 일설에 나주 김씨 시조 김운발의 후손이거나, 호장 중윤 김득장(金得章)의 후손이라 한다.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나주의 속현인 안로에 세거하면서 관향을 안로로 하였다.[3]
- 교하 김씨: 시조 '''김맹정'''(金孟貞)은 나주 김씨 시조 김운발의 후손으로, 1135년(고려 인종 13) 묘청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교하군(交河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본관을 교하(交河. 현 파주시)로 하였다.
- 상음 김씨: 시조 '''김해봉'''(金海奉)은 나주 김씨 시조 김운발의 후손으로 참봉 김두강(金斗江)의 둘째 아들로 성균관 진사에 급제했다.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상음으로 하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증손 김지휘(金自徽)가 1583년(선조 16) 함경북도 경흥으로 이거한 사적이 《나주김씨 세보》에 보인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상음(霜陰) 안변(安邊)으로 하고 그를 시조로 삼은 듯하다.
- 해주 김씨: 시조 '''김우한'''(金佑漢)은 나주 김씨 시조 김운발의 후손으로 1504년(연산군 10)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대동찰방을 지냈다. 해주(海州)를 본관으로 하게 된 연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국조방목에 그의 본관이 해주(海州)로 되어 있다.[4]
5. 주요 인물
나주 김씨는 조선시대와 현대에 걸쳐 여러 주요 인물을 배출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 태조 때 출사하여 태종 때 동북면 난을 평정한 김정준이 광주목사,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후손들의 중시조가 되었다. 계유정난 공신 김도, 을묘왜변 때 왜구를 격퇴한 김경석,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김충수와 진주성에서 순절한 김예수 등이 있다.
현대에는 미군정 시기 대법원장을 지낸 김용무, 제헌국회의원 김용현, 한성대학교 설립에 기여한 김의형, 신민당 수석부총재와 민권당 총재를 역임한 김의택, 육군참모총장, 중앙정보부장,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한 김계원, 대법관을 역임한 김창석과 김지형, 무안군수를 역임한 김철주 등이 있다.
5. 1. 고려
- 김극순(金克淳) : 대장군 안로현주(安老縣主)를 지냈다.
- 김수연(金守淵) : 문과에 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를 거쳐 병부상서를 지냈다.
- 김성고(金成固) : 김수연의 아들로 중정대부, 전의령을 지냈다.
- 김대경(金臺卿) : 김성고의 아들로, 호는 월당(月塘)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고, 행적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렸다. 나주 안로현에 기거한 적이 있어 후손들이 금성에 살게 되면서 본관을 금성으로 하는 금성 김씨(錦城 金氏) 시조가 되었으며,[5] 무안 우산사(牛山祠)에 제향되었다.
- 김가구(金可久) : 김대경의 아들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 김천구(金千久) : 김가구의 동생으로 무오년 난리에 절개를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5. 2. 조선
- '''김정준''' : 조선 태조 때 출사하여 태종 때 동북면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광주목사, 제주목사, 호조참의, 전라도 도관찰사, 해주목사, 함길도 도관찰사,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 겸 판길주목사, 전주 부윤, 중군 총제를 역임했다. 후손들이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 김양 : 김정준의 장남으로 청주·해주목 판관을 지냈다.
- 김증 : 김정준의 차남으로 사옹원 직장을 지냈으며, 계유정난 때 피해를 입은 김종서 장군의 사위이다.
- 김도 : 김정준의 3남으로 계유정난 공신이며, 대장군에 봉해지고 금성군에 책봉되었다.
- 김경근 : 김양의 장남으로 좌군 섭사용, 형조참의에 증직되었다.
- 김취장 : 김증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 후 단종 때 의성 현령을 지내다가, 외조부 김종서 장군이 화를 입은 것에 애통해하며 금성대군 이유(李瑜)와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하였다. 이후 산중에 은거하였다.
- 김경석 : 김정준의 현손. 호는 용주(龍洲). 1515년(중종 10) 무과에 급제하여 만포·강계의 부사 첨사를 지냈으며, 1555년 을묘왜변 때 방어사로 종질 김적과 함께 호남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시키는 큰 공을 세워 돈녕부사에 이르렀다.
- 김적 : 호는 취암(鷲岩)으로 1543년(중종 38) 식년시에 합격하여 통훈대부 광주목사를 역임하였으며, 왜구를 격퇴한 공적을 세웠다. 무안 우산사(牛山祠)에 제향되었다.
- 김충수 : 김적(金適)의 아들로 자는 중심(中心), 호는 귀암(龜巖)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호조참판에 제수 되었다. 정유재란 때 부인 금성 나씨와 함께 순절하여 1799년(정조 23년) 정려가 포장되고, 고향 무안에 정려각이 건립되었다. 이후 1913년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인 충남 공주로 이전하였다. 무안 우산사(牛山祠)에 제향되었다.
- 김예수 : 대제학 김대경(金臺卿)의 후예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 정봉수(鄭鳳壽)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자형(姊兄)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가 의병을 모집하자, 그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왜군들을 크게 물리쳤다. 1593년(선조 26) 6월 왜군이 진주성을 재차 공격하자, 최경회,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9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를 따라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무안 우산사(牛山祠)에 제향되었다.
- 김덕수 : 학자로 이름이 났으며, 무안 우산사(牛山祠)에 제향되었다.
- 그 외 공조좌랑 김복남, 부호군 김세빈, 전라관찰사 김장송, 남원부사 김몽동, 김난익, 김효신, 현감 김우증, 동지중추부사 김상구, 이등공신 김언호 등의 후손이 있다.
5. 3. 현대
- 김용무 : 전라남도 무안 출생으로, 대한민국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미군정 시기 대법원장을 지냈으며,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 김용현 : 전라남도 무안 출생으로,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제헌국회의원을 지냈으며,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 김웅진 : 경기도 화성 출생으로,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제헌국회의원과 2대 민의원을 지냈으며,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 김의형 : 충청남도 공주 출생으로, 한성학원 이사장, 한성여자중학교·한성고등학교 설립, 한성대학교 설립에 기여했으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 김의택 : 전라남도 함평 출생으로,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신민당 수석부총재와 민권당 총재를 역임했다.
- 김계원 : 경상북도 영주 출생으로, 제18대 육군참모총장, 제5대 중앙정보부장, 제5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했다.
- 김근학 : 충청북도 청원 출생으로, 교육부 감사담당관, 편수담당관, 대한민국 학술원 사무국장, 충청북도 부교육감, 대전 부교육감을 역임했다.
- 김성덕 : 경기도 남양 출생으로, 대학교수이자 공학박사이다.
- 김우영 : 충청남도 서천 출생으로, 소설가이자 수필가이며, 한국문인협회 회원이자 문학박사이다.
- 김창석 : 충청남도 보령 출생으로, 대법관을 역임했다.
- 김철주 : 전라남도 무안군수를 역임했다.
- 김지형 : 전라북도 부안 출생으로, 대법관을 역임했다.
- 김광기 : 대학교수이자 사회학자이다.
6. 집성촌
다음은 나주 김씨의 집성촌이다.
지역 | 위치 |
---|---|
전라남도 | 무안군 청계면 학유정 |
충청북도 |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
충청북도 |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대덕리 |
충청남도 | 공주시 탄천면 견동리, 대학리 |
충청남도 | 청양군 대치면 오용리 |
평안남도 | 성천군 통선면 덕암리 |
평안북도 | 태천군 강동면 덕화동 |
평안북도 | 영변군 태평면 관상동 |
평안북도 | 박천군 서면 운포동 |
충청남도 | 홍성군 홍북읍 대동리 |
경기도 |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행가울) |
7. 인구
참조
[1]
문서
숭정 기원후 네번째 임진년 중춘 〇일에 후손 진척의 서문
[2]
서적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
[3]
서적
조선씨족통보
[4]
문서
분적 성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5]
문서
1887
[6]
문서
[7]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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